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만 제국 (문단 편집) == 종교성과 국가 이데올로기 ==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종교개혁]]이 대두하고 기독교 세계 전체가 [[개신교]] 각종 종파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격이 크게 바뀐 가톨릭 교회로 분열되고, 이에 따라 이전 중세의 일상 사회문화적 종교적 느슨함과 동남부 유럽 변경지대에서 이교, 이슬람, 유대교 등 비기독교 이교도들이 본격적인 박멸과 청산의 대상으로 떨어진 동시대 유럽과 달리[* 이런 16-17세기 유럽 전반에서 종교개혁 이후로 각종 정치 제도와 사회 통제 시스템이 종파 불문하고 신학적 이론, 종파적 조직과 함께 성장하면서 동시에 부작용으로 훗날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지독하게 까일 배타성, 억압성도 늘어난 이 과정을 학계에선 '교파화 (confessionalization/konfessionalisierung) 과정'이라 한다] 근세의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으로 신민들의 일상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황실과 정부는 분명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강조했고, 엄연히 폭력적인 정복 전쟁으로 인해 건설된 나라인 만큼 피정복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기세를 꺾는 과정에서 각종 잔학행위와 제노사이드를 저지른다든지, 현지 기독교 성인의 유해를 소각한다든지[* 16세기 후반 세르비아에서 터진 반란을 진압할때 세르비아 나라의 수호성인인 [[성 사바]] 시체를 태운 사건이다], 특정 종교 민족 집단을 집중적으로 박해하던 일들 또한 많았던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종교 정책은 깊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단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여러 종교인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거 자체는 굳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가 아닌 종교국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이런 사례를 가지고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종교와 민족과 관련되어 정말 어떠한 차별과 탄압이 없으며 종교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오스만 국가 내에서 이슬람이 핵심 계층 혹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분명 지배 계급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숭상하고 출세하고 싶으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국교'도 있지만 민간 사회에서의 종교적 다양성까진 굳이 건드리지 않는건 저 멀리 오스만 제국까지 갈 필요도 없고, 당장 우리네 동아시아에서도 자연스러운 풍조였다. 조선만 하더라도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불교계의 '''정치적 권력'''은 철저하게 때려잡고, 사회문화적으로도 확실하게 주류의 위치에서 끌어내렸지만 굳이 불교 전체, 불자 개개인을 때려잡으며 강제개종하려고 들진 않았고, 중국에선 이마저도 훨씬 덜했다. 일본의 경우도 20세기 [[국가신토]]란 괴상망측한 전체주의 사이비 사상 비슷한거 이전엔 애초에 국교를 일괄적으로 강제할만큼 특정 종교가 중앙 정치 권력을 독점한 경우도 없고, [[센고쿠 시대]] [[승병]] 집단들이 보여주듯 불교계의 독자적인 정치적 권력도 일정부분 계속 유지가 되었지만 어쨋든 [[에도 막부]] 성립 이후 공식적인 관이 권장하는 사상은 유교였다. 다른 동시대 문화권을 예를 들자면, 인도에 자리 잡은 [[무굴 제국]]이 황실은 이슬람을 믿으면서도 토착 [[힌두교]]를 전반적으로 존중한건 유명한 경우고, 무굴 제국 역사상 예외적으로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다는 [[아우랑제브]]도 최근 역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실 진짜 동시대 유럽 국가처럼 동네 마을 주민들도 강제개종 시킨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토착 힌두교 귀족, 사원 세력과 마찰을 겪으면서 이 와중 사원 파괴 같은 종교적 탄압 또한 따라온 것이라 보고 있다. 같은 근세 이슬람 제국 중 가장 종교적으로 억압적이었다 볼만한 [[시아파]] [[사파비 제국]] 페르시아도 막상 탄압의 집중 타겟은 '같은 무슬림'인 수니파였지, 아예 종교 자체가 달랐던 유대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존중했던 편이다. 결국 애초에 '종교 국가' 운운하려면 전면적으로 나라 안에 다른 종교 모두 전체를 영구적으로 소멸시킬만큼 종교적 통일성, 단일화를 추구한 경우 자체가 따지고 보면 종교 개혁이란 그 지역 일대에서 중요했던 사건을 겪었던 근세 유럽의 특수성이라 봐야지, 다른 문명권에 유럽만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해당이 안되니깐 '종교 국가라 할수 없다'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명나라, 조선은 '유교 국가'가 아닌게 되고,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12이맘 시아파 종교국가가 아니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주장도 할수있다. 그리고 사실 근세 자체가 엄연히 시대의 한쪽 발은 중세에 걸치고 있었던 만큼, 유럽 안에서도 이런 '종교적 다양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 국교는 확실한 나라'는 자세히 찾아보면 많다. 당장 초기 근대 [[교황령]]만 하더라도 대중동 무역망 유지란 이유로 [[안코나]]에 예외적인 유대인,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 커뮤니티의 존재를 용인했던 바가 있다. 게다가 보수적인 교황이라 평가 받는 [[바오로 4세]] 교황 시절 일이다. 각종 현실적인 여건에 의해서 자국 내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거하고 국가 내에서 종교의 중요성 자체하곤 전혀 다르다는 말이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제국'으로서 면모는 충분히 중요하다. 일단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 전쟁 명분 자체가 이교도를 쳐서 이슬람의 땅을 확장한다는 종교적 명분이었다. 각종 공문서, 대외 외교문서 등에서 오스만 제국은 특히 '[[십자군|이슬람의 땅을 침략했던 이교도들을]] 거꾸로 정벌하는 제국', '무슬림들의 복수를 위해 보내진 지상의 하나님의 그림자 [* ظل الله في العالم, [[아바스 왕조]] 시절부터 이슬람 정치신학자들이 논의해온 전제 세속군주의 권위를 설명하는 이론, 약간 좀 많이 비약하자면 이슬람판 [[왕권신수설]]에서 나오는 지배자에 대한 칭호 겸 비유 중 하나이다]' 같은 전투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강조했다. 사회적으로도 오스만 제국이 '다른 종교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걸 '종교 정책 전반에 흥미 없었다'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오스만 제국의 종교정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비유럽권 근세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아예 종교 자체가 다른 이교도 신민들의 공존도 인정했지만, 이와는 별개로 무슬림 커뮤니티 내에선 이런 저런 종교 정책도 적극적으로 국가가 나서서 관여한 편이다. 당장 나라 정치구조 자체가 개종자 유럽인들이 엘리트 집단을 차지했던 나라다 보니 이런 출세와 신규 지배층 편입 과정을 담당하는 [[예니체리]] 양성기관 엔데룬 학교를 중심으로 원래 발칸반도 전반에 퍼져있던 [[신비주의]]적, 비문자적 성향을 강조한 벡타시 [[수피]] 교단을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반면 이면으로 도저히 국가 내에서 인정해주기 힘들고,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한 아나톨리아 동부, 특히 시아파 페르시아와 접경 지대의 반체제 시아파와 신비주의 수피 교단, 이를 따르는 튀르크나 아랍 부족은 핍박하고, 오늘 현대 튀르키예에서의 [[알레비]] 박해 같은 '''이슬람 내에서의 타자화, 핍박 현상'''의 역사적 기원을 마련했다. 17세기까지 오스만 내에서는 이교도 박해보다 소수종파 박해가 더 심했다고도 볼수 있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오스만의 종교적 배타성과 타종교 박해는 점점 더 심해졌다.] 정리하자면 오스만 제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성격은 한번도 중요하지 않은적이 없었다. 다만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실제 사회에서 수많은 비-수니파 무슬림 신민들이 엄청나게 많고,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국가 운영은 커녕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과 굳이 상호배제적인게 아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스만 제국은 분명히 종교적 다양성, 공존을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 정책 차원에서 명시했고 이는 17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러나 이게 오스만 제국이 무슨 이슬람 제국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표방 안했다더니, 아예 현대 세속 민주주의 국가급의 종교적 평등을 추구한것처럼 오버해서 해석하는것도 곤란하다. 상술된 사례들도 있지만 제국 초창기에나, 전성기를 누리던 고전기에나, 쇠퇴기에나, 말기에나 아예 계획적으로 해당 종교 자체의 씨를 말리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선 종교적 탄압이라 느낄법한 억압 사례도 분명히 종종 있었다. 사실 종교적 명분보다는 근대 민족주의적 명분아래 자행된거지만 어쨋든 나라 자체가 망하면서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아나톨리아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아랍인들에게 아예 줄줄이 케밥 돌림빵으로 [[제노사이드]]급 탄압을 저지른 사례를 보면 아예 이거 나머지 전반적으론 민족, 종교적 관용으로 유명했던 그 제국 맞나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와하비즘]]을 비롯한 현대 이슬람권에서 기승하는 근본주의 문제는 사실 따지고보면 오스만 제국 끝자락 말기 이전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런저런 근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인식적으로 가장 시대적으로 가까운 통합 중동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사례가 전혀 상관도 없는 문제에 끌려오는것에 불과하고... 결국 특히 근세의 관점에서 특정 나라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것하고, 아예 사회적으로 이교도의 존재 자체를 포용하냐 마냐는 별개의 문제란 점을 인정한다면 오스만 제국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충분히 '이슬람 제국'이라 할만큼 종교적 정체성 또한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스만 제국 황실과 국가 엘리트층이 '수니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것과 별개로 실제 집행에 있어선 한창 종파적 배타성이 팽창해가던 동시대 유럽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 다른 이슬람 제국 국가들에 비해서도 유연함과 관용이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초창기에는 튀르크 부족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동로마 제국|로마]]와의 성전"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기 까지 가지(Gazi)로 대표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으로 대규모의 비무슬림 피정복민들을 끌어안는 상황이 되자 이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립 당시부터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와 레반트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제국 내에서 비무슬림 인구가 무슬림 인구보다 더 많았고, 이후에도 비무슬림 인구의 수가 상당한 세를 차지했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 까지도 제국의 백성들을 [[밀레트 제도|'그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 밀레트)를 형성하게 하여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통치]]하고, 형법(Kanun) 만큼은 모든 밀레트가 공통적으로 지키게 했다. 때문에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국이 조각나기 시작하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교 문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자의 종교법에서 금지하는 것[* 이를테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이혼]], 이슬람의 [[이자]][[대출]]]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서로 다른 밀레트 간의 민사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밀레트에 속하지 않은 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일도 매우 흔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당시의 풍토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자신을 소를 떼먹고 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샤리아]]법대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정교회 신자 아버지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척)하고 남편을 '불신자'로 보아 혼인 무효를 이끌어내는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여성,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튀르크인 선원,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리아의 한 시골 마을 같은 이야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이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무슬림은 튀르크인들조차도 포로로 잡힌 영국 선원들에게 '이슬람을 믿을 것을 권하다가' 이들이 한사코 개종을 거부하자, 선실 하나를 내주어 교회로 개조하게 하여 '그럼 기독교라도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예배를 독려하는 튀르크인 선장 이야기라든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왜 [[성모 마리아|성모]]님께 [[요나|기도하지 않소?]]' 라고 개신교인 선원에게 힐난하는 무슬림 선원 등의 일화가 줄줄이 나열된다. 오스만 초기 황제들 또한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보호하고자 했다.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장본인인 [[메흐메트 2세]]는 전란으로 허물어진 로마 제국 시절의 정교회 성당 복구에 금전 지원을 했고 [[보스니아]]를 정복한 뒤에는 ''''제국 신민들 중 그 누구도 기독교도들이나 기독교회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이 칙령이 담긴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보스니아의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셀림 1세]]도 [[아토스]] 산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도원들을 수리하게 하는 동시에 '''"그간 전쟁, 천재지변으로 무너지거나 손상된 정교회 성당, 수도원을 수리할 것이며 이들을 절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교회나 가톨릭, 유대교에 대한 지원을 간간히 한 기록이 발견되며, 성 니콜라오스의 교구였던 미라의 성당 또한 러시아 차르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지원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졌다.[* [[메흐메트 4세]]만 해도 [[카자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중후기 오스만 황제들은 타종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고 이는 나라에 망조가 들기 전인 17세기부터 보여진다. 패전 후 만만한 기독교도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도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사소한 부분으론 겉으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전면적으로 [[술]]을 금지하지 않았다. 가끔 술탄의 명으로 [[금주령]]이 내려진 적은 있으나 일시적인 사례일 뿐이다. 애초에 오스만 황실의 기원인 튀르크인들부터가 술에 관대한 편이고, 옛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대폭 받아들이고 유럽 지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술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에 계속 나왔듯이 당장 비(非) 무슬림 계열 백성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금주법|술을 완전 금지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아예 술탄 본인이 술을 즐기는 [[주당]]인 경우도 있었을 지경. 일각에선 [[바티칸]]에 비교하면 피상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를 보고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그 동기로 지목하는 모양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교권은 아예 상실했지만, 딱 이 이상으론 본 적이 없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피상적인 평가다. 정복 후 총대주교좌 또한 처음에는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격이 높았던 성 사도 성당을 쓰게 해주었다. 성 사도 성당은 몇 년 뒤 다시 뺏기고 아예 해체,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정복자의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이건 황실의 종교적 편협성과 심술보의 산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노후화 문제로 생긴 문제로, 옮긴 옆의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상당히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다.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16세기 후반 오스만 황실이 뺏어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때 새로 받아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요르고스 성당(아야 요르기)도 상당히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성당의 규모는 모스크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크기 자체는 작으나 적어도 지금 현대 모습으로 18세기 재건축할 때는 황실에서 당대 최신식 유럽의 건축가, 건축 기술 다 끌어오며 공들여 지은 것이며, 자세히 조목조목 살펴보면 당장 외부부터 대리석 떡칠에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호화롭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 정부가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만 봐도 종교적 박해나 탄압이 없었던게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이스탄불에서 백년 전엔 이 도시의 반이 그리스어를 쓰며 정교회를 믿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마인'''이라 불렸던 현지 그리스계 공동체가 사라진 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이후 공화정 시절 각종 재산권 분쟁을 빌미로 한 실질적인 민족 탄압 정책이 실시된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물론 튀르키예 내 그리스계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자 업보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 내 튀르키예계 공동체가 그리스의 변방인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 정도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에서 거의 해체되어버린 일도 일어났지만 말이다. 막상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모욕적이고 가슴아픈 건 매한가지겠지만, 사실 중세와 근세 지중해권의 관점에서 보면 저렇게 특정 정복국가가 피정복민들의 종교적 중심지를 뺏어 새로운 지배자들의 종교적 건물로 재개장하는건 해당 국가의 장기적인 종교적 관용, 불관용 정책 자체하곤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데, 애초에 이슬람권, 기독교권 불문하고 지중해와 유럽권 도시 전반에서 주교좌 성당, 금요일 모스크 같은 종교적 중심지는 시장과 시청 같은 다른 경제, 정치적 실무 기관하고 딱 붙어있는게 일반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 도시를 지배하는 정치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중심적 건물에 녹아들기 마련이고, 이런 문맥에서 피정복민들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방금전까지 치열하게 맞서싸우던 적대 세력의 온갖 왕사, 휘장, 예술품 기타등등을 휘황찬란하게 전시하고 있는 중앙 종교 건물을 그나마 좀 세련되게 용도만 바꾸든, 미개인마냥 우악스럽게 때려부수든 간에 어떻게든 새로운 정복자의 정통성을 과시할 용도로 바꾸는 건 필연적인 선택이다. 당장 여기서 서술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과 싸운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들도 그랬고, 이전 중세 [[레콩키스타]] 전쟁 시절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카스티야, 아라곤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 무어인들을 정벌하면서 [[코르도바(스페인)|쿠르투바]], [[세비야|잇시빌랴]], [[그라나다(스페인)|가르나타]] 등 무어인 도시의 중심 모스크들은 재깍재깍 기독교 성당으로 개조했지만, 막상 무슬림들에 대한 강제 개종과 추방은 300-200년 뒤인 1400년대 후반에서야 집중적인 국가 공식 정책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기독교 정복지들도 동네의 중심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보단 약간 급이 낮거나 도시 중심지에서 떨어져있는 성당은 피정복민들이 쓰라고 존립시킨 경우가 보편적이다. 동로마 제국시절부터 오스만 정복 이후로도 한번도 모스크로 개종당한적 없고 지금까지 계속 정교회 성당으로 남은 진귀한 기록을 가진 이스탄불 시내의 [[https://en.wikipedia.org/wiki/Church_of_Saint_Mary_of_the_Mongols|몽골인들의 성모 성당]]이 이러한 경우. 하여간 오스만 제국은 '''이교도에게 특별히 잔혹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관대한 나라도 아니었다.''' 이베리아라면 모를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이교도라고 무조건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처럼 타종교 비율이 높았다면 오스만 치하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처럼 2등 시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되려 신교도 국가들은 오스만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몇 안되는 자국 내 무슬림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신교도 국가들이 오스만의 위협에서 자유롭고 또한 무슬림이 극소수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장에 구교 국가들은 남유럽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여기는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과 맞닿아 있었고 때문에 충돌이 꽤나 잦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